다케다 씨가 남긴 '보물이 없는 곳에 모모타로는 오지 않아요'라는 수수께끼의 힌트는 오카야마가 기비라고 불렸던 시대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새로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기비'라고 해도 솔직히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저것 찾아보니 고훈 시대에 기나이에 버금가는 거대한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가장 알기 쉬운 방법은 고분을 보는 것인 듯하다.
먼 기억 속에서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배운 것 같은데' 정도로 고분에 친숙하지 않은 분도 이번 한번만은 꼭 읽어 보시길 바란다.
고분이란 3세기 후반부터 지금의 긴키 지방과 세토나이카이 연안, 규슈 북부에 걸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수장(그 지역을 지배한 사람)의 묘이다. 그 무렵 긴키야마토 지역을 중심으로 야마토 정권이 탄생해 고분이 출현한 이들 지역에서는 정치적으로 연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기비도 이 중 하나에 속한다.
고훈 시대 중기 조선반도의 영향을 받아 일족인 사람들을 여러 명 매장했던 횡혈식석실이라는 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고분 옆에 출입구를 만듦으로 뒷사람을 추가해 매장하는 '추장'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기 기나이에 거대 고분이 속속 조영되었지만 실은 여기 기비에서도 거대 고분의 조영이 한창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중에 이야기할 쓰쿠리야마 고분은 길이 약 350m로 전국 제4위!
크기만 비교해 보면 톱텐 중 8개가 기나이 고분이고 나머지 2개가 기비 세력이라는 결과이다.
이건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아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단하지!
이렇게 고대 기비는 야마토에 필적하는 곳이었다는 것을 고분만 보고도 알 수 있다.
그 기비 고분 중에서도 매우 희귀한 고분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5세기 후반에 만들어졌고 기비에서는 3번째로 큰 고분이다. 이 지방에서는 드물게 수호를 둘러 파 위에서 보면 두둥실 물 속에 떠 있는 듯한 전방후원분이다.
하지만 찾았을 때는 정비 때문에 물이 빠진 상태였다.
'뭐야 일부러 찾아 왔는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은 게 신기한 일이다.
물론 물이 넘칠 듯이 가득 채워졌을 때 오는 것도 좋겠지만 물이 빠지고 아래쪽까지 들어나서 조금 부끄러운 듯이 있는 고분도 또 다른 맛이 있다.
즉 물이 채워져 있으면 볼 수 없었을 고분의 측면과 참호의 바닥이 보이니 이게 재미 아닌가.
지금은 하나의 참호지만 당시에는 2중이었다고 한다. 분명 아름다운 모습이었음이 틀림 없다.
둑을 거닐며 고분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한 후 민가 사이를 쑥 빠져나가 나무 사이의 비탈길을 천천히 오른다.
그 때까지 고분에 오른다는 경험이 없었던 나는 남의 무덤에 올라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 이런 값진 경험은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수호의 고분은 안전상 문제로 울타리를 두른 경우가 많다. 분명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울타리가 있음으로 보러 온 사람을 고분 자체 그리고 고훈 시대의 기운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뭐랄까 심적인 장벽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곳 료구산 고분에는 울타리가 없다. 단지 그것뿐인데 고분을 매우 가깝게 느낄 수 있고 고훈 시대를 쉽게 떠올려 볼 수 있다.
고분 순례 초보자에게는 안성맞춤인 고분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그 장소를 떠났다.
(다음 편에 계속…)